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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2.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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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츠지 히토나리|역자 양억관|소담출판사 |2015.11.25
페이지 248|ISBN ISBN 안내 레이어 보기 9788973817887|판형 규격외 변형

_책 내용의 결말과 전개에 대해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 : Blu

_나의 시작, 나의 아오().

 

 

 

 

 

 

 집에서 굴러다녔던 책을 집어 읽은 것이기 때문에, 사실 나는 이 책과 세트가 되는 책 한 권이 더 있는 줄 몰랐다. 로쏘가 세트가 되어 에쿠니 가오리와 협업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인지 전혀 모르고 읽었기에 사실 저자 후기를 읽고는 조금 당황했다. 찾아보니 아오이의 시점에서 쓴 것이 로쏘라고 하니, 그 책을 읽고 나면 쥰세이와 아오이라는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두 인물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윤곽이 잡힐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쥰세이는 그렇게 공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었다. 지극히 자신의 예술과 자신의 감정만을 우선시하며 살아가는 인물이기에 소설 속에서 보이는 행보가 상당히 이기적이며, 주변 사람들, 특히나 글 내내 등장하는 메미에게 상처를 많이 입힌다. 인간으로서 이입하기 쉬운 인물은 아니며, 이는 쥰세이가 소설 내내 쫓는 아오이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일 거라 짐작된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그렇게 10년을 그 만을 쫓게 만드는 매력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하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동시에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것엔 논리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 또한 안다.

 

 

 복원 일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돌이키는 세계에서 유일한 직업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생명을 되살리는 작업……. 

냉정과 열정 사이 Blu | 21p

 

 

 소설의 화자, 쥰세이는 복원사 일을 하는 20대 후반의 일본인 남자이다. 복원사라는, 과거의 물건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도록 숨을 불어넣어주는 일을 해서인지 상당히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행보를 내내 보인다. 그것이 다소 답답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라는 이 세가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은 여러가지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과거를 사랑하고, 과거를 잇는 그는 미래를 목표하며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에 꽤나 저항감을 느껴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옛 애인, 아오이를 잊지 못한다. 새로운 애인이자 현재의 애인 메미가 있지만 쥰세이의 관심과 애정은 오로지 아오이를 향해있기 때문에 메미에게 온전한 애정을 주지 못한다. 메미는 쥰세이의 과거와 현재를 지니는 인물로, 쥰세이의 미래를 비춰주지 못한다. 그는 메미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그녀와 현재를 함께하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는 떠올리지 못한다. 아오이의 빈자리를 메미로 메워보고 싶었을 것이나 그건 어리석은 판단이었고, 그것을 본인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메미를 강하게 밀어내지 못하는 것은 미래가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과거에 머무르는 삶을 살고싶어 했으므로.

 

 삶에서 겪은 결핍이 많아서인지, 그는 자신의 결핍을 자꾸만 대체하려고 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의 결핍을 조반나로 채우고 싶어하였고, 아오이의 결핍을 메미로 채우고 싶어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대체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너무도 느리게 온다. 그는 조반나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따랐지만, 조반나에게 쥰세이는 아들같은 제자가 아니라 애정하는 동업자이자 질투가 나는 경쟁 상대였고, 메미로 아오이의 결핍을 메꿀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메미로 인해 아오이의 존재감을 더욱 더 크게 느낀다. 그의 그런 어수룩함은 주변 사람들을 참 많이도 상처입힌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쥰세이라는 인물이 스스로를 잘 아는 듯이 서술하지만, 사실은 참 자신을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스스로가 과거를 살고 싶어하고, 그렇기에 아오이에 집착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는 아오이를 통해서 계속하여 미럐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메미와의 미래는 상상하지 못하지만 아오이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행동한다. 아오이는 사실, 쥰세이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였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냉정 속에 열정을 숨기고 걸어가는 듯한…….

냉정과 열정 사이 Blu | 133p

 

 

 현실과 꿈, 냉정과 열정. 그 사이에서 쥰세이는 끊임없이 헤매인다. 줏대도 중심도 없이 방향조차 잡지 못한 채 끊임없이 갈등하고 열망한다. 미래를 향해서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과거만을 쫓고싶은 꿈을 꾼다. 그가 꾸는 아오이의 꿈은 그런 혼란이 드러나는 듯 하다. 하지만 냉정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반대로 열정적이기만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 속의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계속해서 흔들린다. 몇년이나 지난 옛 애인과 다시 만나 사랑할 수 있을 리 없다는 냉정과 그녀와의 사랑을 좇고 싶다는 열정 사이에서. 아오이의 서른 살의 생일날 오른 쿠폴라는 스스로의 열정을 향한 마지막 끈이었을 터이다. 그 열정의 끝에서 잡은 파랑()은 그에게 미래로의 결심을 준다.

 

 쿠폴라의 재회는 비록 쥰세이에게 미래를 그릴 힘을 잃게 하였지만, 현재의 힘을 상기시켜준다. 메미는 현재를 함께하였으나 그것은 앞으로를 위한 현재가 되지 못했고, 그런 차가운 현재는 쥰세이에게 아무런 원동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쥰세이는 결국 아오이를 밀라노행 열차에 보내고 나서야 깨닫는다. 불확실함에 휩쓸려 주저하는 냉정 속에서는 어떤 미래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아오이와의 재회라는 미래를 만든 것은 자신과 아오이의 쿠폴라를 향해 가겠다는 현재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레일 앞쪽을 바라보았다. 이 열차가 나를 데리고 가는 그곳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백 년을 살아갈 것을 맹세하면서.

 "새로운 백 년."

냉정과 열정 사이 Blu | 256p

 

 

 그에게 파랑은 결국 새로운 시작점이다. 쥰세이에게는 새로운 연애를 위한 시작이자 출발이었고, 미래를 위한 현재이다.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중도는 어디일까. 나는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열정을 쫓아 불안하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그것이 더욱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사실 애정관계로서 표현되었기에 쥰세이의 메미를 향한 어중간한 마음이 그를 참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 나도 다른사람들도 안주하고 싶은 마음과 욕구를 향하는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팡질팡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고민을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그저 미래로 끊임없이 떠미는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라는 존재만큼 무심한 것도 없는 것 같다. 10년의 세월 속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길을 헤매던 쥰세이가 누구에게나 하나씩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