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책 내용의 결말과 전개에 대해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위대한 개츠비
_낭만으로 점철되었지만,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다들 썩었어.” 내 외침이 잔디밭을 건너갔다. “너는 그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야.
이 이야기의 화자, 닉 캐러웨이가 주인공 개츠비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대사이다. 그가 말하는 썩음, 그리고 이 이야기가 관통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1920년대 미국 사회의 경제, 그리고 그 배경을 실제 삶으로 두고 살아갔던 미국 사람들이 추구하던 가치란 말이다.
일단 글을 풀어내기 앞서 알아두어야 하는 점이 있는데,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개츠비를 상대로 서술하는 문장들을 보면 소설의 전개 내내 개츠비라는 인물에 대해 제법 호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첫 만남부터도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를 한다는 점이나 (“그을린 살갗은 보기 좋게 팽팽했고 짧게 올려친 머리 모양은 매일 다듬는지 단정했다. 그에게서 어떤 사악함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위대한 개츠비, 67p) 그가 마지막에 개츠비의 장례식의 자리를 지키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점도 이를 보여주지만, 나는 그가 개츠비에게 어떠한 동질감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같은 웨스트에그에 사는, 부와 영예를 동경하는 위치의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가 톰, 데이지, 베이커와의 자리에서 농담조로 자신을 묘하게 비관함과 동시에, (“너하고 있으니까 나는 문명인이 아닌 것만 같아.” / “농사 이야기라든가 뭐 그런 얘기나 해볼까?”, 25p) 한편으로는 개츠비의 화려한 파티에 흠뻑 빠져버리는 모습을 통해 그러함을 느꼈다. 개츠비라는 인물이 캐러웨이의 동경이라는 점이었음을 말이다. 하지만 개츠비가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이하기까지 겪는 일련의 사건들 그 이후, 그가 결국 자신의 고향을 향해 돌아가게 만든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그가 본 사람들의 어떤 일면이 그가 그들을 향해 등을 돌리게 만든 것일까.
1920년대의 미국은 그야말로 경제적인 대부흥의 시대였다. 1929년, 즉 30년대를 들어서며 시작된 대공황이 오기 전까지 미국은 그야말로 유럽권을 비롯한 경제에서 최강자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 미국 부자들, 즉 상류층들은 불로소득을 통한 끝없을 것만 같았던 호황을 누렸고 중산층들 또한 국내 경제가 상승세를 탐에 따라 많은 돈을 얻게 된다. 개츠비는 이 중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었고, 데이지를 비롯한 그 무리들은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두 인물은 서로의 다른 위치를 각자 동경하며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개츠비는 캐러웨이의 동경이었다. 이러한 각자의 낭만을 가졌던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야말로 한순간의 환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즉, 결국 무척이나 허무한, 허상에 불과한 이상향일 뿐이었다.
개츠비는 여느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만큼이나 낭만적이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 속에서도 데이지를 잊지 못해, 그녀를 만난 5년 뒤에까지 그녀만을 바라본다. 그녀를 다시 재회한 순간에 보이는 흥분감은 그의 고대가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던 가를 짐작게 한다. 데이지 또한 남편인 톰의 외도에 시달리던 차에 만난 옛 연인 개츠비를 보고 감격해한다. 두 사람의 재회는 언뜻 보아 계급을 뛰어넘은 사랑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생각보다 약하고 가느다란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모험이었던 개츠비를 사랑했고, 개츠비는 부와 계급이 부여하는 영예로움 속에서 완벽했던 그녀를 사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실패한 농사꾼의 부모님을 자신의 세계에서 지워가며 꾸려갔던 그의 미래라는 환상 속에서 데이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다 헤어진 데이지는 개츠비에게 그 환상의 결정체가 되어갔던 듯하다. ‘제임스 개츠’가 ‘제이 개츠비’로써 진정으로 도약할 수 있는, 인간 그 이상의 동경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개츠비라는 불안정한 모험을 통해 불안감 속에 살았던 데이지는, 그동안 부와 상류층 사회라는 안전한 구역 안에서 자신을 확실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을 원했다.
“그녀는 자기 인생이 당장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나타났으면 하고 바랐다… (중략) …사랑, 돈, 혹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현실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것들은 모두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톰을 사랑했다. 그녀가 개츠비의 파티에 가서 그와 함께 했던 춤 말고는 즐거워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원하는 안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개츠비의 파티는 그래서 멈췄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엇갈리기 시작했다는 의미인 불발탄의 신호였다.
결국 제임스 개츠가 만들어낸 제이 개츠비라는 낭만은 톰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다. 데이지는 더 이상 예전처럼 개츠비를 사랑할 수 없었고, 개츠비는 더 이상 데이지라는 낭만을 쥘 수 없었다. 그의 낭만의 완전체가 그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그가 ‘위대한 개츠비’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 순간 개츠비는 힘을 잃었다. 웨스트에그에서 바라보던 데이지 집의 초록색 불빛만을 향해 따라가던 개츠비에게 남은 것은 결국 개츠라는 현실뿐이었다. 그의 장례식에 유일하게 모습을 비춘 손님이 그의 대성을 반짝이는 눈으로 말하는 아버지, 그의 서재에 감탄했던 어느 날의 손님, 그리고 그를 동경했던 캐러웨이뿐이었다는 것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캐러웨이는 “개츠비는 자신이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칭하는 동시에 “결국 그가 옳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개츠비를 삼킨 것”’과 “그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부유하는 더러운 먼지”들을 언급한다. 그렇다, 캐러웨이가 동경했던 건 개츠비가 가지는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태도였으며, 그런 자신의 낭만을 옳은 것으로 보았지만 현실-특히나 상류층들이 누리려는 호황과 그들이 형성하는 고정된 울타리-은 그러한 낭만들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진정한 가치는 뭘까? 사실 이 소설 또한 그 가치에 대한 답을 내리지는 못하는 듯하다. 결국 낭만을 위해 살아왔던 개츠비는 그 환상의 소실과 함께 죽었으며, 자신들의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데이지와 톰은 이스트에그를 떠났으며, 캐러웨이는 이 일련의 일들에 의해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자신들 각자의 낭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이 인간 사회도 낭만투성이 인간들에 의해서 돌아간다는 것이다. 1920년 당대의 미국은 더욱더 그러했다. 그렇기에 그 낭만은 소중하며, 그 낭만이 환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쫓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에 매몰되지 않도록 살아가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황홀한 미래를. 이제 그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뭐가 문제겠는가.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어느 찬란한 아침… /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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