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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5.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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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

天気の子, Weathering With You, 2019

 

개요 애니메이션 | 일본 | 112분 | 2020 .05.21 재개봉, 2019 .10.30 개봉

감독 신카이 마코토

등급 15세 관람가

흥행 누적관객 716,664명(07.03 기준)


_영화 내용의 결말과 전개에 대해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영화 감상 후기를 이 영화로 먼저 끊게될 줄은 몰랐다. 좋았던 영화로 분명 시작을 하게 될 줄 알았으나… 좋은 영화는 말이 안 나오고 나빴던 영화가 보고 나면 말이 많은 법인가보다. (개인차야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날씨의 아이>를 보았고, 신카이 마코토에게 실망도 조금 해버려 <언어의 정원>을 연속해서 보고 왔다. 이 감독 왜 이렇게 후퇴했지.

 

 

 

言の葉の庭, The Garden of Words, 2013.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본 것도 아닌데다가 골수팬도 아니기 때문에 그의 작품관을 완벽하게 이해하였다고 말하기엔 어려운 감이 있다. 그가 좋아하는 테마가 존재할 것이고-물론 <너의 이름은>과 <언어의 정원>만으로 이 감독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파악하기 쉽다-그런 감독의 작품세계는 연작을 통해 완성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도 <날씨의 아이>를 호평하는 평가들은 대부분 신카이만의 세계관이 잘 녹아들어 그 점이 좋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감독이 지나칠 수 있는 요소들을 삽입한 듯도 보이고, 그래서인지 2번째 보니 좋았다는 평가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의 기준은 그럼에도 확고하고, <날씨의 아이>는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작품은 연작이나 시리즈가 아닌 이상 해당 작품만으로도 독립적으로 완성도가 있어야하며-물론 시리즈물도 그래야하지만 그래도 감안해보자-1번 보고 좋아서 또 봤더니 2번째는 더욱 더 좋아야지, 2번 보아야 재밌어서는 안된다. 만약 스스로가 첫관람 때 별로였는데 2번 보았더니 재밌었다면 그 감독이 좋아서 2번 봐준 것이다. 관람자들은 재미 없는 작품을 두 번 봐주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썩 나쁘다… 까지는 아니다. 실제로 <너의 이름은>이 너무 히트를 쳐서 날씨의 아니가 비교된 것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날씨의 아이>는 비교해보니 별로인 게 아니라 그냥 별로다. 개연성도 문제이지만, 개연성 부족이 결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은 몰입 부족인데 이는 결국 해당 컨텐츠를 감상하는 데에 큰 해악을 끼친다. <너의 이름은>을 당시에 극장에서 보았을 때의 느낌은 '신카이 마코토가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그림체와 스토리로 변화를 기하여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였는데, <날씨의 아이>는 전작에서 맛 본 성공코드에만 어필하기 바빠졌다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실제로 <너의 이름은>은 완성도가 높았다. 개연성도 탄탄해서 그게 절정부에서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였고.

 

 

 

출처: 네이버 영화 <날씨의 아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주인공, '호다카'이다. 주인공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극을 이끌어가며 관객들이 이입해야하는 대상이다. 주인공을 따라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바라보고 느끼고, 그리고 관객들은 그 감정선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가출소년'이 핵심적인 설정인데, 왜 가출했는지가 도통 나오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의 주변 설정들을 자세하게 제시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극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작품들도 있지만 적어도 이건 작품은 아니었다. 주인공 본인 말로는 답답해서 나왔다고도 하고, 그렇게 나온 상황에서 신비로운 빛을 목격하며 무작정 도쿄에 나오는 장면도 이후에 등장하지만… 이런식으로 초자연적인 현상, 그리고 그에 대한 이끌림 같은 감정적 흐름에 어필할 거였다면 주변 상황도 그러한 분위기에 맞게 설정했었어야 한다. 미성년자의 불분명한 거주와 이에 따른 위협들, 신분과 제도적인 한계 등에 대한 현실적인 장면들을 줄줄이 제시하는데 얘가 왜 이런 개고생을 하는지를 관객들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친구가 분명 힘들고 개고생을 하는 건 알겠는데, '왜' 하는지를 모르니 물음표만 뜨는 것이다.

 

  아이들은 충동적이고 주변 상황을 살피는 것이 어른들에 비해 단순한 편이나, 그렇다고 막무가내는 아니다. 나만 해도 고등학생 시절 사소한 문제로 진지하게 집을 나오고자 하였을 때, 거주나 돈이라는 문제에 부딪혀 생각을 접었으니까. 도서관에서 집구하기 책을 보며 전세나 월세같은 걸 끄적이면서까지 고민할 정도였다.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집사정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 시절의 어린 충동이었다.) 즉, 집이라는 보금자리를 나온다는 것은 그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할 만큼 현재의 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기존의 생활을 탈피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큰 결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아는 이상, 공감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실종신고를 하였다는 부모님에 대한 언급이 들자마자 당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을 아들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신고를 하였을 부모님에 더 이입이 간다면… 그건 본인이 사회의 때에 찌들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더 공감할 뿐이기 때문이다.

 

 

 

날씨의 아이, 쓰레기통에서 주운 종이백에서 총이 떨어지자 놀라는 장면.

 

 

  그리고 또 의문스러운 점은 애초에 이 권총이라는 장치의 등장이다. 이건 결코 일본이 총기소지불법 국가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극 분위기와 잘 맞지 않아서도 아니다. 이 총이 극에서 하는 역할이 정말, 딱히, 없기 때문이다. 총이 등장하는 주요 대립 장면은 굳이 권총이 아니었어도 전개시킬 수 있는 장면들이다. 그럼 감독은 왜 굳이 자극적이고 이질적인 권총을 소재로 사용한 것일까? 우리는 이 권총이 극에서 하는 가장 큰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된다.

 

 

 

날씨의 아이, 위기에서 권총을 사용한 주인공 '호다카'를 목격한 형사들이 호다카를 수소문하는 장면

 

 

  그렇다. 바로 (소위) 자유를 갈망하는 주인공 호다카를 끊임없이 쫓아야하는 '어른'을 배치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부모님이 실종신고를 하였어도 실종되는 사건이나 인물들은 매우 많고 이런 단순 실종을 경찰들이 집요하게 쫓아다니게 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하지만 총기를 소지한 청소년이라 하면? 당연히 경찰 쪽에서도 뒤쫓게 된다. 그럼으로써 주인공과 충돌할 갈등인물을 설정할 수 있으며, 위기를 조성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갈등을 위한 갈등을 조성하다보니, 정작 주인공과 주로 대치하게 되는 이 '어른' 인물들과의 관계 설정이 허술할 수 밖에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설정 문제가 아니라 연출이 어색하다. 작중에서 호다카를 계속해서 방해하는 것은 어른들이다. 나쁘게는 미성년자 성매매를 조장하는 호스트 남자, 일반적으로는 총기소지 청소년을 추적하는 경찰들까지. (전자는 단순하게 신변을 위협하는 위험 존재니 넘어가고) 후자에 대해서 어떠한가? 상식적으로 집이 없어보이는 청소년을 그대로 방치하는 쪽이 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일반적이지도 못하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들을 주인공의 행보를 방해하는 존재처럼 그린다. 그들이 경찰을 불신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이라도 제시되었다면 영화의 진행은 더 부드러웠을 것이다.

 

  이 부자연스러운 연출은 여주인공인 히나네 남매가 자신들을 아동보호소로 데려가려는 것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이 아이들은 왜 보호소로 가기 싫어하는가? 자신들을 떨어트릴거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신변이 위험하고 잘 곳조차 찾을 수 없는 떠돌이 생활을 감수할 정도인가? 이전에 왔던 경찰이 보호소로 가게 되면 떨어져야한다고 남매에게 강요했다던가, 남매 두 사람이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다던가, 또는 어려운 상황에서 가해지는 압박으로 인해 느끼는 심리적 위축이 있다던가와 같은 설정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연출 정도만 있었어도 이 장면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날씨의 아이, 갈 곳이 없어진 세 사람이 정처없이 돌아다니던 중 경찰에게 취조 위기를 당하는 장면.

 

 

  사실 가출과 보호자가 없는 청소년 가족, 이들의 사회적인 약점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비중을 낮추는 것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 사회적으로 중요한 주제이긴 하나 이 때문에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가 너무 묻히기 때문이다.

 

  날씨의 아이는 근본적으로 '세상'과 '개인' 사이에서의 선택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서는 안된다는 것, 여기에 자연의 순리를 그대로 두어야한다는 메시지를 살짝 더한 이야기인데, 이 주제의식이 너무 흐릿하다. 솔직한 마음으로 주제의식 자체는 매우 좋다. 일본은 실제로 전체주의 사상이 팽배한 국가이고 관련 컨텐츠도 너무 많으며, 그러한 컨텐츠들이 상업적으로 성공까지 하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기에 이런 개인의 희생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더욱 소중하다. (<귀멸의 칼날>과 <진격의 거인>이 사랑받는 이 나라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하지만 문제는 연출이 부족하다보니 자꾸 이 호다카의 '개인'을 향한 선택이 자꾸 '민폐'로 느껴지는 것이다. 주제는 좋은데 왜 자꾸 이런 꼰대같은 생각이 드는 건가 하는 자문을 후반부 내내 반복하였다. 이 연출의 문제는 호다카의 선택을 러닝타임 내내 진중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호다카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데, 작품이 이 갈등을 진지하게 조성을 못 해주는 것이다.

 

 

 

날씨의 아이, 경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주하던 도중 의도치 못한 폭발사고가 일어나버린 장면.

 

 

  다시 앞에서 말한 이야기의 반복이다. 분명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인데,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에 대해-정확하게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왜 이러 방식으로만 해결하려는지에 대해-관객은 내내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초에 이 청소년들이 왜 이토록 어른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하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금전적 또는 사회적인 시스템으로부터 생계의 위협을 받는 아이들은 그것을 지원해줄 수 있는 어른들에게 의존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신들이 믿었던 어른들이 늘 실망스러운 면만 보여주었다던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어른들의 매크로식 해결방식에 질리게 되었다던가와 같은 '특별한 계기'를 만들어 이들이 이토록 폭발까지 일으켜가며 바깥을 전전긍긍하는 것인지에 대해 납득시켜주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처음에 언급하였던 주인공 설정에 대한 빈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지금까지 말한 문제들은 전부 가출 설정만 명확했어도 해결될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가출을 했던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면 '아, 주인공이 경찰에게 잡혀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저렇게 필사적이구나' 하며 따라갈을 터이다. 하지만 명확한 설명이 없으니 '아, 확실히 섬에서 사는 주민의 삶이 엄청 갑갑하긴 하겠지.' 하고 '납득을 위한 짐작'만을 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여전히 실종된 아들을 계속해서 찾을 부모님을 머리 저 구석에 애써 집어넣으며 말이다.

 

  설정이 너무 많아도 본 주제를 흐리지만, 설정 공백이 과해도 주제를 흐린다. 자연스럽게 넘겨야할 장면들을 계속 자연스럽게 못 넘기니 집중이 번번이 깨지고 이가 몰입을 방해한다.

 

 

 

날씨의 아이, 경찰을 피해 제물로 사라진 히나를 만나러 가기 위해 호다카가 달려가는 장면.
날씨의 아이, 호다카를 돕기 위해 케이스케가 형사 타카이를 제압하는 장면.

 

 

  케이스케 또한 감정묘사가 지나치게 부족한 '어른' 인물 중 하나이다. 영화의 극후반까지도 '어른이 되어라', '나라 전체가 살 수 있다면 한 명의 제물 쯤은 괜찮지 않나?' 하는 태도를 고수하는 인물이다. 현실을 대변하지만 주인공의 메세지에 꺠달음을 얻고 그를 적극적으로 조력하게 되는 역할로, 호다카의 "난 그저 한 번만 더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俺はただもう一度あの人に会いたいんだ!)" 대사에 죽은 아내를 떠올리며 호다카를 제지하러 온 마음을 바꾸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양육권을 둔 싸움을 계속하는 현실. 어쩌다 맡아졌지만 정이 들은 가출소년 호다카과 맑음소녀 히나. 자신의 1순위 목표와 비록 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소중한 아이들 사이를 갈등하는 인물인데, 이렇게 말로 풀면 괜찮아보여도 이 인물 또한 심리 묘사가 너무 부족하였다. 경찰의 강압적인 미성년자(호다카)를 향한 체포 과정,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절실함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출이 산만하다. 호다카를 막는 형사에게 분노할 거였으면 적어도 본인은 호다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손을 올리거나 발로 차는 것만은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나? 아무튼 여러모로 연출의 문제가 너무 많았던 영화였다.

 

 

 

날씨의 아이, 히나가 자신의 몸의 변화에 대해 호다카에게 고하는 장면.

 

 

  물론 이야기하다 보니 단점이 나열되었는데, 장점도 존재하는 작품이다. 일단 당연하지만 시각적인 연출은 최상급이다. 신카이 감독이 이번에 더욱 발전된 영상미를 보여주며 얼마나 공들였는지가 보였다. 실제로 신카이 특유의 실제같으면서도 환상적인 배경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도 건재하였고, 좋은 자연을 보여주었다. 스토리도 분명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영상 매체인 이상 시각적인 연출의 장점은 분명한 강점이다. 개연성이 부족하다보니 그림에만 신경쓴 과한 포장재 같다는 생각도 안 든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영상미가 훌륭하니 스토리에 대해 자꾸 더 아쉬움이 든다. 스토리만 더 탄탄했으면 이 작화가 더 빛을 발하였을 텐데.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가 조성하는 화면만큼은 순수하게 아름답다. 신카이가 화면에서 사용하는 빛과 색체는 정말 '신카이만의 것'이라 개연의 부족함을 화면이 보충해주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물론 현실은 스토리가 작화를 먹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주제 의식과 영화가 전달하려는 바 만큼은 정말 괜찮았다. 개인은 소중하고 재난으로 죽을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이냐 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그 메세지의 '도구'로서 재난과 개인을 제시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작품 속의 이야기는 연출이며, 우리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곰곰이 되짚어보아야한다. 사실 이들이 겪는 재난은 그 누구의 탓이 아니다. 그저 세상이 그렇기에 그런, 자연재난이다. 이를 위해 바치는 산제물, 모두를 위해 스스로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히나. 그저 아이임에도 우연히 무녀로서의 능력과 힘을 얻게 되며 떠안는 책임에 대해 어른들-의 위치에 있을 현실의 어른들-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어른들과 그 이후를 살아갈 청소년들 사이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보여주기위해 소외된 청소년을 그린 듯 한데, 지겹게 말했듯이… 조금만 설정 분배에 신경을 썼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아쉽다.)

 

  결론적으로 개연성은 부족하고, 연출은 부자연스럽지만 전체적인 스토리 자체와 메세지는 좋았다. 화면과 그 안의 자연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웠고.

 

 

 

 

 

  근데 신카이 감독… 이런 무맥락 관음구도는 이제 진짜 그만하면 안되는 것인가? (이것도 연출의 문제라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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